한국어문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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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06 13:09
[조선일보] [양해원의 말글 탐험] [47] 영어에 푹 젖은 우리말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31/2017083103532.htm… [2]

그런 밤은 버스가 좋다. 지하철에서는 비 오는 풍경을 볼 수 없으니까. 비는, 쏟아붓거나 부슬거리기보다 추적추적해야 제맛이다. 차도 좀 터덜터덜, 내릴 때까지 몇 자리 비어 있어야 안성맞춤. 라디오에서 어느 '빗물'이라도 흐르면 더 말해 무엇하리. 기나긴 한강 다리 중간쯤, 우산 없이 걷는 처자(處子)를 본 적 있는가. 그 청승맞음이 얄궂게 그럴싸하다. 아무튼 올여름 참 푸졌다. 비가 많이 온 덕분일까, 많은 비가 온 덕분일까?

'곤 회장은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말부터 꺼냈다.'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영어(takes a lot of time)를 그대로 옮긴 표현이다. 우리말로는 '시간이 많이(오래) 걸린다'가 익숙하다. 실제로 말할 때도 그러지 않는가. '많은 비가' 역시 '비가 많이'라야 자연스러움을 알 수 있다. 영어에서는 관형어(많은)를, 우리말에서는 부사어(많이)를 주로 쓰기 때문이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는 어떤가. '즐거운 주말 되세요'가 아님만도 다행이지만,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하면 더 즐거우련만.

영어처럼 구태여 목적어를 끌어댄 표현도 거북살스럽다. '이산화탄소는 온실가스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부자는 적은 연락처를 가졌더라도 다양한 인물과 소통하는 경향을 보였다.' '비중이 크다, 연락처가 적더라도'로 바꿔보자. 신문 글이 얼마나 영어식으로 기울었는지 확 드러난다. '차지하다, 보유하다'는 필요도 없다.

한번 물들면 걷잡을 수 없는 걸까. '사실관계를 확인할 만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정보가 없다' 두 마디면 된다. '분석이 정밀하게 진행돼야'(정밀하게 분석해야)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꾸준히 노력해서) '시끄럽다는 데 문제가 있다'(시끄러워서 문제다) '가장 큰 폭으로 상승해'(가장 많이 올라)…. 어느 쪽이 익숙하고 매끈한가. 영어에 잔뜩 젖은 우리말, 말릴 일이 태산이다.

열나흘 비 뿌린 8월이 떠났다. 노래하는 시인 조동진도 떠났다. 그이가 적셔준 가슴은 마르지 않았으면….



양해원 글지기 대표
입력 : 2017.09.01 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