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문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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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0-15 14:26
[이투데이] [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머드러기’ 찾아 떠난 여행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0  
   http://www.etoday.co.kr/news/view/1802109 [4]

언니가 올가을 장터 여행을 시작했다. 걷기 좋은 봄가을에 시골의 인심이 묻어나는 장터를 찾아다닌 지 올해로 3년째다. 딱히 필요한 게 있어 두메산골로 가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온 적도 없다. 봄이면 시골 할머니들이 들에서 캐다 파는 냉이, 쑥은 물론 깊은 산속에서 뜯은 향 짙은 나물 등을 사다가 다듬고 데친 후 먹기 좋게 잘라 동생들한테 한 봉지씩 선물한다. 야무지게 묶인 나물 봉지를 풀면 언니가 장터 할머니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도란도란 들린다. 참 정이 많은 우리 집 큰딸, 나의 언니이다.

며칠 전엔 강원도 두메 정선 5일장을 다녀왔단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을 찾아 떠난 여행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자주 다니시던 국밥집에선 눈물깨나 쏟았을 것이다.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었건만 늘 아버지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산다. 살아 계신다면 올해 여든세 살. 언니는 사계절 내내 아버지 손을 잡고 경치 좋은 장터를 찾아 맛난 안주에 술잔 가득 소주를 따라 드릴 것이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중략)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그리움으로 가슴이 무장무장(무지무지의 전라도 사투리) 타는 시간을 보내 온 언니가 가장 좋아하는 시, 안도현의 ‘그대에게 가고 싶다’이다. 정선 여행을 다녀온 날 꿈속에서 아버지의 환한 미소를 보았다고 했다. “그거면 됐어. 한동안 꿈에서도 못 뵈었는데….” 강하디강한 사람이 쉬이 눈물을 흘리는 걸 보니 언니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다음 주말엔 다 함께 아버지 산소에 가서 국화 한 묶음을 놓아 드리기로 했다. 정선에서 사 온 찰옥수수의 구수한 냄새가 입안 가득 퍼지며 언니와 함께 그곳에 다녀온 느낌이 들었다.

언니가 돌아간 후 보따리를 풀어 보니 토실토실 영근 알밤, 말린 곰취·곤드레나물 묶음, 방금 캔 듯한 팔뚝만 한 더덕 등이 정스럽게 들어 있다. 어느 것 하나 실하지 않은 게 없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향을 맡아 가며 머드러기를 고르는 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머드러기가 뭐드래요?”라고 묻는 이가 많다. 강원도 사투리로 생각한 모양이다. 생김생김과 말맛이 강원도 같긴 하다. 머드러기는 표준말로, 과일·채소·생선 등의 많은 것 가운데서 다른 것들에 비해 굵거나 큰 것을 뜻한다. 어머니와 시장에 갔던 날을 떠올려 보자. 과일이나 생선을 단번에 고른 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신선하고 큰 과일, 조금이라도 살이 더 많은 생선을 고르고 고르다 어머니는 “저놈으로 줘유~” 했을 게다. 그렇게 어머니가 한참 뒤적이며 골라낸 것이 바로 머드러기이다.

사람 중에도 머드러기가 있다.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다. 군계일학(群鷄一鶴), 백미(白眉) 등의 한자말을 대신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순우리말이다.

머드러기를 뺀 나머지는 ‘지스러기’이다. 골라내거나 잘라내고 남은 것을 말한다. 알뜰한 우리네 어머니들은 지스러기조차도 갈무리한다. 그 본보기가 ‘덤불김치’이다. 무의 잎과 줄기, 또는 배추의 지스러기로 담근 김치이지만 그 맛은 아주 좋다. 하지만 사람 지스러기는 환영받기 힘들다.

당신은 ‘머드러기’인가, ‘지스러기’인가.



노경아 기자 jsjysh@etoday.co.kr
입력 2019-09-25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