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문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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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7-04 14:03
손진호 어문기자 "지금 우리말글의 주인공은 언중" 『지금 우리말글』펴내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31  
   http://ch.yes24.com/Article/View/36374 [8]

말은 생명력이 있다. 그래서 언중(言衆)의 말 씀씀이에 따라 생명력을 유지하기도, ‘죽은말’이 되기도 한다. 요즘 우리말글은 어떤 모습일까. ‘교양인’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표준어, 표준어가 아니더라도 언중이 즐겨 쓰는 입말, 말맛이 좋아 입에 오르내리는 각 지역의 방언, 때때로 세대 간 의사소통을 가로막거나 연결하기도 하는 각종 신조어와 줄임말 등…. 다양한 우리말글이 입에서 입으로, 글에서 글로 전해지며, 말의 세계에서 저마다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 우리말글』  에서 표준어만을 쓰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투리로 묶여 있거나 사전에 오르지 못했어도 감칠맛 나고, 삶의 향기가 오롯이 배어있는 낱말들, 표준어 둥지 밖을 서성이다 사라지는 낱말을 언중에게 알리려 애쓴다.

지난 30년간 어문기자로 있으면서 처음으로 우리말글에 관한 책을 냈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며칠 전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비슷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기분 좋으면서도 떨린다”고 했더니 “흥분돼 밤잠을 설치는 게 아니냐?”라고 되묻더군요. 사실  『지금 우리말글』 이 출간되고 며칠씩 머릿속이 하얘질 때가 있습니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가끔씩 진이 빠질 때도 있고요. 그렇지만 묘하게도 기운이 솟는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1987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어문기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언젠가부터 입버릇처럼 ‘우리말글에 관한 책 한 권 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취재기자의 글을 다듬는 데 만족했거든요. 그렇게 만만디로 살아오다 이제야 언중의 말글살이를 다룬 책을 낸 겁니다. 그러니 계면쩍기도 하고, 쪼금 뿌듯하기도 하고….

『지금 우리말글』 은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 칼럼을 깁고 더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 맞습니다. 입으로만 책을 썼던 제가 『지금 우리말글』 을 내게 된 데는 ‘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가 밑바탕이 됐습니다. 이 칼럼은 제 인생에 닥쳐온 커다란 사건(?)으로 태어났습니다.
 
2014년 11월 24일 어문연구팀장이던 제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콘텐츠기획본부 전문기자로 발령 난 것입니다. 제가 맡은 첫 번째 임무가 ‘말글 칼럼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당시 심규선 본부장께 “한 달에 한 편 쓰게 해 달라. 아니 2주에 한 편 쓰겠다”고 사정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편 써라.”

다음 날, 서점 문이 열리기 무섭게 우리말글 관련 책을 사들였습니다. “그래 버티는 것이 힘들겠지만 버티다 보면 앞으로 나아가게 되겠지. 한번 해 보자.” 그렇게 해서 첫 회 ‘삼천포’(2014년 1월 24일 자)를 시작으로 ‘맨드리’(2017년 3월 7일 자)까지 3년 3개월간 연재했습니다.

 ‘짬뽕을 초마면으로 고쳐서 사용하라고? 웃기는 짬뽕이다!’라는 책의 띠지 문구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초마면 한번 먹으러 가요. 근데 초마면 하는 식당 있나요?” “초마면 파는 곳 찾아볼게요. 한 그릇 하시죠.” 『지금 우리말글』  이 출간된 후 지인들과 주고받은 문자입니다. 이 문자 내용에서 보듯 언중은 초마면이 뭔지 잘 모릅니다. 나가사키 잔폰이 맑은 국물의 맵지 않은 요리라면, 우리네 짬뽕은 고추기름과 고춧가루를 쓰면서 빨갛고 얼큰한 맛으로 바뀌었습니다. 짬뽕의 뿌리는 초마면일지 모르지만, 1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재탄생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사전은 짬뽕을 초마면으로 고쳐 사용하랍니다. 그야말로 언중의 말 씀씀이를 무시한 것이지요.

칼럼을 쓰면서 독자들에게 댓글이나 전화 등으로 많은 피드백을 받았을 듯싶은데요. 재미난 사례가 있나요.
 
“뒤에 오면 석 잔이라니 자네가 더 먹어야 하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7권 화적편 1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 글을 보며 떠오르는 낱말은 없나요? 주당이라면 금세 눈치챘을 겁니다. ‘후래자삼배(後來者三盃)’입니다.

2016년 여름 저녁나절, 더위를 핑계 삼아 신문쟁이 서너 명이 뭉쳤지요. 모두들 취기가 제법 올랐을 때 누군가 “후래자삼배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라고 물었고, 일행 중 한 명이 “임꺽정 중후반부에서 본 듯싶다”고 했습니다. 이게, 웬 횡재? 순간 술이 확 깼습니다. 글감을 찾은 것입니다.

다음 날 곰곰 생각하니 만만찮은 글감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근대 역사소설의 최고봉이라는 『임꺽정』 은 무려 10권으로 이루어진 장편 소설입니다. 일주일마다 글을 ‘막아야 하는’ 저에겐 『임꺽정』 을 다 읽을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요샛말로 가성비가 별로였습니다. 그래도 들어온 글감을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다음에 한 번 더 읽기로 다짐하고 주마간산격으로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 결과, 어쨌거나 ‘후래자삼배’는 2016년 12월 6일자에 ‘마감에 쫓기지 않고’ 실을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사실(팩트) 확인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칼럼은 ‘하얀 찔레꽃’(2016년 5월 3일 자)입니다. 제게 ‘알려왔습니다’를 쓰게 한 유일한 글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약초도감 등의 자료도 그렇고, 실제로도 찔레꽃은 흰색, 또는 분홍빛이 도는 흰색이다. 그러니 붉은 찔레꽃은 ‘없다’. 혹시 유전자 변형을 했으면 모르되.’

이 대목 중 ‘붉은 찔레꽃은 없다’는 부분은 사실이 아니라는 지적이 이어졌습니다. 독자 한 분은 붉은 찔레꽃을 찍은 사진을 제게 보내왔습니다. ‘붉은 찔레꽃은 거의 없다’ 정도의 표현이었으면 별문제 없었을 텐데, 다음 구절 ‘민들레에 홀씨는 없다’와 절묘한 대구를 이루는 글맛에 취했던 것일까요(물론 아직도 우리나라엔 붉은 찔레꽃이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음 날 독자 지적을 받아들여 ‘…토종의 붉은 찔레꽃은 거의 사라졌다가 전남 해남의 한 야생화 화원에서 증식에 성공했다고 합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많이 쓰는 줄임말과 급식체, 유행어 등에 대한 기자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자신이 공주처럼 예쁘고 귀하다고 착각하는 것을 일컫는 ‘공주병’이 사전에 올라 있는 걸 아시는지요. 반면 2006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된장녀(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를 하는 여성)’와 ‘간장녀(알뜰 소비를 하는 여성)’는 여전히 유행어에 머물러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답정너’라는 말이 유행했지요.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뜻의 신조어입니다, 그런가 하면 대학가에서는 동아리, 새내기, 뒤풀이 같은 낱말이 서클, 신입생, 애프터 같은 말들을 밀어냈습니다. 말과 글은 생물과 같아 시대 상황을 반영해 빠르게 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10대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급식체를 잘 모릅니다. 우리 신문의 ‘급식체를 아시나요’를 통해 몇몇 사례들을 보았을 뿐입니다. 돌돔을 ‘똚’, 부부를 ‘쀼’로 줄여 쓴다고 하더군요. 한데 아직까지 제 주위에서 급식체로 대화하는 10대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급식체가 언어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진득이 지켜볼 요량입니다.

며칠 전 20대 초반의 조카와 ‘문자질’(우리말샘1에 올라 있어 한번 써 봅니다.^^)을 하다 ‘오키도키용’이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오픈사전에 ‘오케이’보다 긍정적이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만 그리 와닿진 않았습니다.
 
30년 동안 한 직장에서, 한 가지 일을 했다는 사실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어문기자 생활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혹시 직업병은 없나요?

2003년 동료 기자 3명과 함께한 ‘표준국어대사전 오류분석 작업’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문기자는 사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웬걸, 사전에 오류가, 그것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무모하게 달려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는 의욕만큼은 차고 넘쳤습니다. “사전에 오류가 있다니… 바로잡아야겠다.” 넷이서 뜻을 모아 1년 남짓 매달렸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표제어 오류 50여 개, 총 오류 600여 개를 바로잡았습니다. 새삼 서울 청계천 책방에서 7,3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사전을 사들고 올 때의 발걸음이 그리워집니다. 이 작업이 ‘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를 꾸려 가는 든든한 바탕이 됐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좋은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잎새’는 충청 지역에서 쓰는 ‘잎사귀의 방언’에서 낱말의 심상을 인정받아 문학적 표현에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속병’의 잘못으로 묶여 있던 ‘속앓이’도 표준어가 됐고. ‘묵은지’도 표제어에 올랐습니다. ‘마실’도 ‘마을의 방언’에서 ‘이웃에 놀러 다니는 일’을 뜻하는 낱말이 됐습니다.

2017년 3월 불현듯이 허무와 권태가 밀려왔습니다. 게다가 혈압은 급상승했습니다. 고심한 끝에 회사에 3개월간 휴직을 신청해 몸과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6월에는 회사로 돌아와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로 유명한 김혜남 선생과 한지 공예로 외규장각 의궤 속 역사를 재현하는 양미영 작가 등을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파킨슨병 진단 후 18년을 버티고 있는 김 선생의 “병 걱정으로 시간 보내기엔 인생 너무 아깝잖아요”라는 말은 저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올해 1월 어문연구팀으로 돌아와 4월 1일, 30년 근속상을 받았습니다. 개근상 받고 이처럼 기분 좋기는 처음입니다.^---^

책 제목 『지금 우리말글』  중 ‘지금’이라는 낱말이 눈길을 끕니다. 이 책이 왜 지금 필요할까요?
 
“‘A는 표준어, B는 비표준어이므로 A를 써야 옳다’는 글에서 벗어나자. 지금은 비표준어이지만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낱말을 찾아내 언중에게 돌려주자.” 제가 글을 쓰면서 정한 원칙입니다.

사전은 언어의 문란을 막는 마지막 보루여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전이 만능은 아닙니다. 언중의 말 씀씀이를 살펴 의미를 헤아려야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 언중이 쓰는 말글에 주목한 까닭입니다. 지금 우리말글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언중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