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문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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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5-23 14:35
어문기자의 제2의 인생-글과함께 박재역 대표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335  
   교열기자의 두벌갈이-박재역.hwp (38.5K) [0] DATE : 2016-05-23 14:35:11
교열기자의 두벌갈이
박재역 ㈜글과함께 대표이사 

2016년 5월 현재 나는 ‘주식회사 글과함께’의 대표이사이다. 2010년까지는 동아일보 교열기자였다. 정년퇴직 후 운 좋게 초빙교수라는 것도 해 보고 한국어 강사도 하며 지내다 지금의 회사 대표 자리에 앉기까지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5년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던 듯 모두 어제 일처럼 느껴져서 ‘5년밖에’라고 표현했다. 결코 쉽지 않았던 그간의 여정을 돌아보며 언젠간 퇴직의 길을 걸어야 하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고자 펜을 들었다.

애벌갈이 마감-동아일보 정년퇴직

‘정년퇴직 통보’라는 제목 아래 “귀하는 어쩌고, 저쩌고… 2010년 12월 31일부로 정년퇴직 대상임을 통보합니다”라고 쓰인 종이 한 장이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달랑거렸다. 출근하자마자 눈에 띈 책상 위 흰 봉투에 그 종이가 들어 있었다. 정년퇴직하는 그날까지 일하겠다는 결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만 55세, 이 젊은 나이(?)에 정년이라니? 밀려오는 회한이 행여 얼굴에라도 나타날까 봐 잠시 자리를 떴다. 그 서운함과 아쉬움을 숨길 수 없어 한숨을 크게 내뿜는 것으로 갈음했다. 
정년퇴직의 아픔은 겪어 본 사람만 안다. 새 출발이니, 제2의 인생이니, 세컨드 라이프니, 이모작이니 하는 소리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 정도로 아팠다. 어디에선가 눈에 띄었던 문구, ‘남자의 정년퇴직은 상처(喪妻) 다음으로 슬픈 것’이라는 말이 피부에 다가올 정도였다. 내겐 이미 퇴직 후 두벌갈이할 만한 일터가 확정돼 있었음에도 그랬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떻겠나.

두벌갈이 준비-영어회화와 한국어교원 자격증
 
동아일보 퇴직을 3년 정도 남겨뒀을 즈음 우리 아들이 느닷없이 물었다.
"아빠, 정년퇴직 몇 년 남았지?"
"퇴직? 3년 정도 남았지."
"그럼, 지금쯤 뭔가 준비가 돼 있어야잖아."
"그렇지. 준비해야지."
그러고 나서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1년이 후딱 지나갔다. 이제 2년 남았다. 오늘 하루가 지나면 퇴직하는 그날이 하루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까짓 나가면 뭐라도 하겠지.’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랴.’ 그런 편한 소릴 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딱 두 가지만 생각했다. 하나는 영어회화를 좀 더 배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어교원 자격증을 따는 것이었다. 그래야 뭔가 숨통이 틔어도 틜 것 같았다.
먼저 영어회화를 제대로 좀 배워 보려고 그 비싼 종로 월스트리트인스티튜트에 등록했다. 사실 영어회화는 그 이전부터 조금씩 배워 왔다. 책을 보기도 하고 당시 유행하던 MP3를 3개나 망가뜨리기까지 나름대로 열심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쉰 넘어 배우는 외국어가 만만할 리 없다. 주위에선 경상도 억양이 잔뜩 밴 남대문 영어를 한다고들 빈정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들은 뭐 남대문 영어라도 잘하니’하는 굳센 마음으로 10개월을 돌파했다.
동아일보 퇴직을 1년 앞둔 2009년 1월쯤, 그때 나이 만 53세. 한국어교원 자격증을 따려고 관심을 대학원에 꽂았다.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해야 했기에 회사에서 제일 가까운 대학을 찍었다. 거기가 바로 상명대 대학원 한국학과였다. ‘한국언어문화’를 전공하며 참 열심히도 공부했다. 오죽하면 우리 아이들이 “아빠, 고등학교 다닐 때 그 정도 했으면 최소한 서울대는 갔겠다”라고 했을까. 나는 대학원 공부가 그렇게 재미난 것인 줄 그때 알았다. 무엇보다 ‘왜’라는 궁금증을 대부분 해결할 수 있어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재직 중에 대학원을 다닌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비교적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어문연구팀 팀장과 팀 후배들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들의 배려가 없었다면 아마도 중도에 포기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들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마지막 논문 학기를 남긴 채 중국 칭다오로 향했다. 중국에서 강의 나가면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논문 심사를 통과하고 석사학위와 함께 한국어교원(2급) 자격증을 마침내 받아냈다. 영어회화와 한국어교원 자격증, 이 두 가지를 비장의 무기로 삼고 두벌갈이에 나섰다.

두벌갈이 출발-중국해양대 한국학과 초빙교수

동아일보의 애벌갈이를 마감하고 두 달 후 중국해양대 한국학과로 향하며 두벌갈이에 들어섰다. 무슨 일이든 저절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할 때가 있다. 아무리 동아일보 경력이 있다 해도, 한국어교원 자격증이 있다고 해도 멀리 중국의 대학에서 어느 날 갑자기 ‘모십니다’라는 사인이 쉽게 오지는 않는다. 중국 대학이 뭐 급여가 어쩌고 저쩌고들 하지만 그런 자리라도 비기만 하면 이력서 들이미는 한국인이 수두룩하다. 나 역시 중국해양대 입성은 그 대학 우더싱(吳德星) 총장과 친구처럼 지내는 어느 한국인의 손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바로 국립국어원장을 지내셨던 경북대 이상규 교수이다. 그가 국립국어원장 재직 당시 MS코리아 주관 포럼에서 축사를 마친 후 어설픈 발표를 했던 나를 찾아주셨다. 그 이후부터 형제처럼 지냈다. 그런 그가 나를 중국해양대로 데리고 가서 우 총장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얼마 후 한국을 방문한 우 총장과 동행한 중국해양대 한국학과 교수이자 칭다오세종학당 원장인 이해영 교수가 초빙 의사를 밝혔고 이쪽에서 수락 이메일을 보냄으로써 중국행이 확정됐다. 정년퇴직 7개월 전 일이었다.
퇴직 이듬해인 2011년 2월 둥팡(東方)항공 여객기를 타고 낯선 칭다오 공항에 내렸다. 학교에서는 30여 평짜리 외국인 교직원 전용 아파트를 숙소로 제공했다. 관리비 전액도 부담해 주었다. 아파트 주위에는 철조망이 높이 둘러쳐 있고 CCTV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돼 있어 흡사 교도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파트를 드나들 때마다 만나는 사람은 모두 외국인이어서 가볍게 인사라도 나누려면 어김없이 영어로 소통해야 했다. ‘아! 그놈의 영어!’ 더욱이 한국어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면서 한국어를 배우겠다며 찾아 온 1학년 신입생이나 세종학당에 등록한 중국인 앞에 설 때는 난감 그 자체였다. ‘에라, 너희들 칭글리시나 내 콩글리시나 그게 그거’라고 되뇌며 어설픈 영어회화 솜씨로 신나게 강의를 이어갔다. 그때 그 장면을 영상으로 남기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 싶다.
중국해양대에서의 강의는 겨우 3학기에 그쳤지만 중국 대학생들과의 교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순진하고 착했으며 모두가 나를 지극 정성으로 대해 주었다. 그들 덕분에 중국에서 불편을 모르고 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대학 강단을 뒤로 하고 교수의 길을 접었던 것은 함께 간 아내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 악화 때문이었다. 가족이 우선이니까.

두벌갈이 2탄-글쓰기 강사

귀국 후 한동안 출판사 요청으로 단행본 대필도 해 보고 신문사에서 한시적 교열 일도 하면서 다시금 두벌갈이 2탄을 기대하며 칼을 갈았다. 그 즈음 본의 아니게 골절상으로 몇 주 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입원해 있는 동안 교열 건이 하나 들어왔다. 비용은 형편없이 낮았으나 지겨운 병원생활을 이겨 내는 데는 교열만 한 것이 없었다. 일은 인천에서 받았는데 의외로 남양주시 역사박물관에서 펴내는 책이었다. 그때도 버릇처럼 교열 과정을 빼곡히 적은 교열노트를 함께 보냈다. 그게 담당 팀장 마음에 들었던가 보다. 이력서를 보내 주면 강의할 수 있는 데를 알아봐 주겠다고 해서 이튿날 바로 보냈다. 며칠 후 팀장은 남양주시평생교육원 강의를 총괄하는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해 뒀으니까 이력서와 커리큘럼을 준비해서 찾아가 보라고 했다.
퇴원 후 절뚝거리면서 평생교육원을 찾아 담당 팀장을 만났다. 그날 바로 강좌 개설을 승인받고 2013년 가을학기부터 고정 강사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다. 이듬해 봄학기부터는 수강생들의 요청에 따라 심화반 하나를 더 개설해 두 강좌를 열었다. 그 두 강좌는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현재 수강생 중에는 강좌 개설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 학기도 빠지지 않고 수강하는 이들이 있다. 4개 학기 이상 들은 수강생도 10여 명은 된다. 그들에게 물어봤다. 언제까지 들을 거냐고. 그들 모두 “끝까지 간다”는 대답을 쉽게 한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는 금요일과 토요일 오전은 무척 행복하다. 
 
두벌갈이 3탄-(주)글과함께 대표이사   

퇴직 후 4년째인 2014년 가을, 특별한 결심을 해버렸다. 회사를 하나 차려야겠다는 결심이 서기가 무섭게 뜻을 함께한 다섯 분과 의기투합해 회사 창립 모임을 마련했다. 다들 새로운 회사 멤버가 된다는 생각에 얼굴이 상기된 이들도 있었다. 그 다섯이 작심하고 문법과 교열 공부를 해야겠다고 나섰다. 그런 그들의 뜻을 존중해 공휴일을 포함해 4일 동안 28시간 연강을 소화했다. 그러고 나서 ‘올댓라이팅’이란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을 마치고 ‘www.allthatwriting.com’이라는 도메인도 확보했다. 역삼동에 사무실도 마련했다. 그런데 세상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만 내 곁에 남아 있고 다 떠났다. 그 중 한 사람인 심용재 이사는 10년간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그야말로 회사에 ‘올인’했다. 지난 1년간 둘이서 회사의 미래를 향해 사업을 기획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자료를 찾아다니며 이윤이 얼마 안 되는 회사를 어렵사리 꾸려 나갔다. 다행히 강의와 글쓰기 컨설팅, 교열 작업이 끊임없이 이어져 주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그 중심에는 홍석훈 ㈜가갸소랑 대표가 있었다. 그는 대학로에서 강의를 개설해 주기도 하고 교열 일이 밀리면 우리 쪽으로 넘겨주기도 했다. 올해 1월 사무실을 역삼동에서 송파구 가락동으로 확장 이전을 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했다. 지인들도 만나고 SNS 활동도 다시 시작했다. 그 사이 많은 사람을 만났다. 기업 대표도 여럿 만나고 언론인도 만났다. 마케팅 전문가도 만나고 SNS 전문가들도 만났다. 일주일에 거의 한두 번은 누군가를 만났다. 그들에게서 많이 배우며 느끼고 있다. 그들 중 누군가는 ‘블페는 불패신화!’라는 카피를 내 귀에까지 넣어주기도 했다. 나 또한 블로그에 글을 꾸준히 올리며 관리하고, 페이스북에서도 친구(페친)들과  매일 교류하고 있다.
블로그 하루 접속자가 평균 1500명은 된다. 가장 많이 접속한 날은 27000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거기서 강의 정보를 확인한 사람들이 사무실로 강의를 들으러 온다. 주말반과 평일반은 기준 수강 인원이 다 찼다. 심화반 개설을 원하는 이들이 있어 전문 교열자 양성반을 이달에 개설하기로 결정하고 이미 공지를 띄운 상태다.
획기적인 일은 가갸소랑 홍 대표와 합류한 점이다. 회사의 활발한 움직임을 간파한 가갸소랑 홍 대표가 3월쯤에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기꺼이 수용하고 4월에 개인사업자를 법인사업자로 등록을 마치면서 홍 대표를 이사로 영입했다. 회사 이름을 ‘(주)글과함께’로 바꿨으며 회사 도메인도 ‘www.writing.ac’로 전환했다. 출판등록까지 마무리하면서 이제 ‘글과함께’는 모든 출항 준비를 끝냈다. 

두벌갈이를 앞둔 분들에게

인간 수명이 길어지고 고령층이 늘어나며 백세인생이 코앞이란 말들을 많이 듣는다. 50대 정년이라 가정해도 이후 30년은 너끈히 활동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애벌갈이를 성공했든 실패했든 상관없이 두벌갈이에서 성공하면 대성공이다. 오래 사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다. 여러 해 사는 것만 장수가 아니다. 하루를 오래 살아도 장수이다. 그래서 나는 좀 더 긴 하루를 보내려고 매일 오전 5시가 되기 전에 일어난다. 긴 하루 동안, 많은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간다. 오늘 하루가 저문다는 것은 살아갈 하루가 줄어들었다는 뜻이며 죽을 날이 하루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가능한 한 하루를 오래,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두벌갈이도 반드시 준비가 필요하다. 두벌갈이에서 성공을 하느냐 여부는 차후 문제다. 두벌갈이를 하느냐 여부가 먼저라는 말이다. 아직 두벌갈이를 성공했다고 할 만한 처지가 아님에도 감히 이런 말 하기는 이르다는 거 잘 안다. 진행 중인 사람이 마치 완성한 양 떠들어대는 게 아니다. 기업의 성공과 실패는 하늘이 결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고…. 노후에 무슨 일이든 일을 하면서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 바로 노후 준비 아닌가. 그 준비가 이르면 이를수록 유리하다는 말은 내 작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앞으로 지면이 허락된다면 두벌갈이 준비 과정, 중국해양대학 초빙교수 경험과 남양주시평생교육원 강사 경험, 그리고 사업장을 마련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세세한 경험을 나누고 싶다. 물론 그 과정에서 터득한 노하우가 중심 이야기로 전개될 것이다.